영주 소수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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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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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 인물 | 안향, 안축, 주세붕, 안보 |
건립 연대 | 중종 36년(1541년) |
사액 연대 | 명종 5년(1550년) |
다른 이름 |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목차
소수서원(紹修書院)[편집]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내죽리)에 있다.
내용[편집]
사적 제55호. 榮州 紹修書院 Sosuseowon Confucian Academy, Yeongju
1541년(중종 36)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에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다가 1543년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8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오면서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명종은 신광한에게 명하여 서원의 이름을 정하게 하였다. 신광한은 무너진 교학(敎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으로 소수(紹修)라고 지었다. 명종은 친히 어필로 직접 써서 하사하고(사액), 국가에서 지원을 하게 되었다.(명종어필소수서원현판(明宗御筆‘紹修書院’懸板))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그대로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현재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건물로는 보물 제1403호인 강학당(講學堂),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등이 있다.
그 밖에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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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출처: digerati via 민백 요약 발췌
관련인물[편집]
참고문헌[편집]
『태학지(太學志)』
『서원등록(書院謄錄)』
『전고대방(典故大方)』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소수서원등록(紹修書院謄錄)』
『문화유적총람』(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한국건축미』(주남철, 일지사, 1983)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영주시·영풍군, 1988)
「백운동서원의 설립과 풍기사림」(윤희면, 『진단학보』 49, 진단학회, 1934)
「조선서원일고」(최완기, 『역사교육』 18, 역사교육연구회, 1975)
「조선전기서원과 향약」(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론』 8, 1975)
출처[편집]
- ↑ 『태학지(太學志)』
- ↑ 『서원등록(書院謄錄)』
- ↑ 『전고대방(典故大方)』
-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 『소수서원등록(紹修書院謄錄)』
- ↑ 『문화유적총람』(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 ↑ 『한국건축미』(주남철, 일지사, 1983)
- ↑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영주시·영풍군, 1988)
- ↑ 「백운동서원의 설립과 풍기사림」(윤희면, 『진단학보』 49, 진단학회, 1934)
- ↑ 「조선서원일고」(최완기, 『역사교육』 18, 역사교육연구회, 1975)
- ↑ 「조선전기서원과 향약」(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론』 8, 1975)
추가 정보들[편집]
안향[편집]
안향(安珦, 1243년 ~ 1306년) 은 고려의 명신(名臣)·학자이다. 본관은 순흥,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1]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문종 이후에는 문종의 휘인 향(珦)을 피해(피휘) 향(向)으로 적기도 했으며 초명을 따라 안유(安裕)로 불리기도 했다.
1289년(충렬왕 15)에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는데 조선후기의 각종 기록에는 이때 원의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교육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낙성하였다.
주자를 숭배하여 그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어 두고, 주자의 호(號)인 주자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이것은 주자의 저서를 보고 거기에 심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그를 한국에 맨 처음 주자학을 받아들인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라 보고 있다. 묘는 장단(현 장풍군) 대덕산(大德山)에 있다.
사액서원[편집]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국어})
주세붕[편집]
조선 중종ㆍ명종 때의 문신ㆍ학자(1495~1554).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저서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고, 경기체가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 14수가 전한다.({국어})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1543년에 건립하였다. 이는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민백})
청백리[편집]
淸白吏. 「1」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 「2」『역사』조선 시대에, 이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ㆍ사간원의 수직(首職)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벼슬아치.({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