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구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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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해설문[편집]

(*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경영한 황해도 고산군 석담에 있는 고산구곡을 그린 그림이다. 이이는 36세인 1571년(선조4) 고산구곡을 찾아 각 곡(曲)의 이름을 짓고 이곳에서 은거의 뜻을 밝혔다. 고산구곡도는 이이의 후학들에게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상징 하는 그림으로 널리 유행하였다. 이 <고산구곡도>는 현존 사례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올라가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의도에 따라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주도하여 1688년(숙종14)경에 완성한 그림이다. 그림의 전체 구성은 왼편 제1곡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제9곡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된다. 각 곡에는 주요 경물의 명칭을 적어놓았고, 고산구곡의 실경과 고산구곡가의 시어(詩語)를 절충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 특징이다. 두루마리 위쪽에는 각 곡마다 3편의 시가 적혀 있다.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한글로 쓴 이이의 고산구곡가가 먼저 나오고, 이를 송시열이 한문으로 번역한 시와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등 9명이 쓴 무이도가(武夷棹歌) 시를 차운한 시가 순서대로 적혀 있다. 여기에 적힌 이이의 고산구곡가는 17세기 후반기의 한글 표기법을 참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 부기[편집]

  • 주희(朱熹)가 만년에 은거하면서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자연을 읊은 [[무이구곡도가|「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 율곡은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웠고, 1578년에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고 한다.[1]
  • 율곡의 고택은 황해도 해주시 고산면 석담리에 있으며, 종택은 9곡 중 4곡과 5곡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2]
  • 연도1(1688년)은 <고산구곡도> 자체가 처음 완성된 연도이고, 이후로 연도2(1701년) 사이에 걸쳐서 추가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3]
  • 이 전시자료의 원본은 전하지 않고, 『조선사료집진』(하) 속에 사진으로만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4]
  • 또 다른 <고산구곡도>로 1781년(정조 5년)에 정조의 명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5] 각기 다른 시점에 제작된 <고산구곡도>들은 병풍이나 판화 등 다양한 형태로도 전해지고 있다. 본 전시자료는 상기 도록 해설문에 언급된 바와 같이, 현전하는 <고산구곡도> 중 가장 오래 전에 제작된 것으로 꼽힌다.
  • 전시자료 도록에서 "작자 미상"이라고 했는데, 이는 본 <고산구곡도>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참여를 했지만 그 범위와 주체가 명확하게 판가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 이미지[편집]

고산구곡도, 『조선사료집진』(하)

위치[편집]

3D 실사가상현실[편집]

  • 전시실 내 위치 영상(아래는 임시 대체 영상)

연계 항목[편집]

(* 시맨틱 프로세스 추가 후 자동 생성 예정) (* 임시 테스트본)

이 문서 관계 피연계 노드 (내부 자원) 유형
고산구곡도(은/는) ~에_있다 조선사료집진 문헌작품

갤러리[편집]

참조[편집]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산구곡도'에서 발췌·편집(2016/12/22)
  2.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85쪽 참조: 네이버 검색 '책 본문'에서 확인(2016/12/22)
  3. 위키백과 '고산구곡도 판화' 참조(2016/12/26): 네이버지식백과 '고산구곡도'에서 1차 검색 후 원출처에서 확인.
  4. 위키백과 '고산구곡도 판화' 참조(2016/12/26): 네이버지식백과 '고산구곡도'에서 1차 검색 후 원출처에서 확인.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산구곡도' 참조(2016/12/22): 네이버지식백과 '고산구곡도'에서 1차 검색 후 원출처에서 확인.